“오늘 시장 같이 가요.”
아내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달력은 토요일을 가리키는데, 내 마음은 수요일쯤에 멈춰 있었다.
그래도 조용히 셔츠 단추를 채우고, 장바구니를 들었다.
익숙한 천 가방. 가죽 손잡이는 손의 모양대로 닳아 있었고, 바닥엔 묵은 채소물 자국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시장.
오늘도 어김없이 소란스럽다.
고등어는 은빛 몸을 뒤척이고, 고추는 햇살 아래서 더욱 붉다.
사람들은 욕 같지만 정겨운 말들을 주고받고, 아주머니는 어제 했던 농담을 오늘도 웃는다.
나는 여전히 조수다.
장바구니를 든 남자.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을 따라 걷는 남자.
어릴 적엔 어머니의, 지금은 아내의.
어머니는 시장을 참 좋아하셨다.
상추를 고르며 바람을 읽고, 마늘을 들었다 놨다 하며 다음 주의 식탁을 점치셨다.
나는 늘 손을 놓쳤지만, 어머니는 나를 한 번도 잃지 않으셨다.
늘 같은 자리에서, “여깄다.”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돌아오게 했다.
요즘은 그 말을 자주 떠올린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날들 속에서, 누군가 내게 “여깄다.” 하고 불러주길 기다린다.
아내가 어묵을 건넨다.
국물은 따뜻하고, 문득 어릴 적 먹던 엿이 떠오른다.
삶은 점점 덜 달고, 더 짭짤해진다.
아마도, 익숙해지는 중일 것이다.
가던 길에 장바구니가 찢어졌다.
계란이 바닥에 터지고, 노른자가 천천히 퍼진다.
사람들이 지나간다. 아내가 말했다.
“이건 그냥 오늘 하나쯤 흘린 거라고 생각하자.”
그 말이 가슴에 남았다.
하나쯤 흘린 것.
그건 어쩌면 우리 삶 전체를 설명하는 말 아닐까.
하나쯤 흘린 시간.
하나쯤 잃은 꿈.
하나쯤 놓친 말.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오늘을 만든다.
집에 와서 찢어진 장바구니를 잠시 들여다봤다.
요즘은 꿰매 쓰는 사람도 없고, 나도 그냥 새로 살까 싶었지만, 이상하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룩진 천 위를 조용히 문지르며, 나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손끝으로 만져본다.
그건 고치려는 몸짓이 아니라, 내 삶을 잠시 붙잡아두려는 일이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다시 선다.
무게는 여전하지만, 그 안의 의미는 더 단단해졌다.
계란, 채소, 묵은 얼룩, 그리고 기억.
그리고 나는 안다.
장바구니의 끝에는 언제나 삶이 있다.
그 삶은 대체로 무겁고, 가끔 찢어지고, 아주 드물게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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