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상처받은 날, 나는 다시 태어났다”

상처는 때때로 사랑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서운했고, 약간 불편했고, 기분이 나빴지만…
괜찮을 거라고, 사랑하니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넘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은 쌓이고,
말이 되지 않는 고요함으로 변해버린다.
마침내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아, 나 지금 다치고 있었구나.

나는 세 사람에게서 그런 상처를 받았다.
아버지, 아내, 그리고 친구.
누구보다 가까웠고,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누구보다 나를 아프게 만든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나를 무시했다.
내가 무언가를 이뤄도 그가 보기에 부족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흠을 찾아내고는
“그렇게밖에 못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말은 칼보다 짧았고,
침묵은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
나는 늘 그의 기준에 맞추려 애썼고,
그러면서 점점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어떤 파장을 남겼는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았지만 상관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기준은 언제나 그 자신에게만 유효했고,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그의 틀 안에 나를 억지로 넣으려는 사랑이 더 많았다.
나는 그 사랑에 찔리고, 그 사랑에 다쳤다.

아내는 결혼 후에 변했다.
사랑보다는 평가가 많아졌고,
이해보다는 무시가 잦아졌다.
내가 하는 일, 내가 꾸는 꿈, 내가 느끼는 피로까지
그녀에겐 점점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갔다.

그리고 돈.
그녀는 쉽게 썼고, 나는 조용히 감당했다.
함께 꾸었던 삶의 그림은
그녀의 사소한 낭비로 하나씩 어긋났다.

무엇보다 아팠던 건,
그 모든 행동을 “별 일 아니잖아”라고 치부하는 그녀의 무심한 말투였다.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
존재가 투명해지는 그 기분은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걸 몸으로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친구.
나는 그와 오랫동안 진심을 나눴다고 믿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다가온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접근했고,
필요할 때만 내게 진심을 꺼냈다.
그가 내게 웃던 날, 그의 마음속은 이미 닫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가장 서러운 순간은,
진심을 다했다고 믿은 관계가
사실은 시작부터 가짜였다는 걸 알게 되는 일이다.
나는 그날, 내가 준 마음이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상처를 받았다.
말로 옮기면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상처들은 내 삶의 결을 바꿨다.

나는 한동안 사람을 의심했고,
사랑을 믿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아픔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다시 쓰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걸.

나는 아버지에게 배웠다.
존중이 없는 사랑은 지배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아내에게 배웠다.
사랑은 존재의 인정이라는 것을.

나는 친구에게 배웠다.
진심은 줄 수도 있지만,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건네야 한다는 것을.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때로는 문득 다시 아프고,
어떤 밤엔 서러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감정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감정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는 그렇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조심스럽게 살아간다.

사람을 다시 믿는다는 건
완전히 회복돼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믿어보기로 선택하는 용기다.

나는 그 용기를 배웠다.
그 모든 상처 덕분에.

그러니 상처는 아픔이 아니라
내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였다.
지워지지 않아도 괜찮다.
그 자리에 내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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