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그랜드캐니언에서 느낀 자유, 협곡 위를 나는 꿈

 

비행기가 애리조나 주 북부의 하늘을 스칠 때,
옆자리의 할아버지가 불쑥 말을 걸었다.

“처음인가요? 그랜드캐니언?”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창밖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곧, 지구의 나이를 보게 될 거예요.”

그 순간,
창밖 아래 거대한 틈이 열렸다.

붉고 검붉은 바위들이 계단처럼 이어지고,
그 사이로 어둠이 천천히 잠겨 있었다.

지도가 아니라, 사진도 아니라,
지구의 살이 깊게 베인 상처였다.

나는 숨이 멎는 듯했고,
손끝이 저절로 창문을 붙들었다.

전망대에 내렸을 때,
공기는 다른 세상의 것처럼 느껴졌다.

길이 446km, 깊이 평균 1.6km, 폭 6.4~29km.

그 숫자들은 입 안에서 금세 부서져
가루처럼 흩어졌다.

이곳은 수학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이었다.

바람이 협곡의 벽을 타고 올라와
뺨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는
수백만 년 동안 물과 바람이 쌓아올린 시간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난간에 서서 층층이 쌓인 바위를 바라봤다.

붉은 층은 태고의 열기 같았고,
노란 층은 바다의 퇴적 같았다.
회색의 얇은 선은 오래된 편지의 잉크처럼 희미했다.

이곳은 암석이 아니라, 시간의 페이지였다.

문득, 오래전 장면이 떠올랐다.

헐리우드 스튜디오에서
‘해리포터’ 속 빗자루를 타고 가상 협곡을 날던 날.

그때 나는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바람 소리를
‘진짜 같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콜로라도 강이 깎아 만든 이 골짜기에서 부는 바람은

진짜라는 말의 무게를 새로 써주고 있었다.

가상은 순간을 빌려주지만,
현실은 시간을 건네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협곡은 천천히 불타기 시작했다.

바위가 주황빛으로 달아오르고,
그 위로 보랏빛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구가 하루를 덮는 거대한 이불 속에서,
나는 한 점의 먼지였다.

돌아가는 길, 가이드가 말했다.

“그랜드캐니언은 관광지가 아니에요.
지구의 일기장이죠.”

그 말이
할아버지의 첫마디와 겹쳐졌다.

이곳은 수백만 년 동안
비와 강물과 단층이 써 내려간 기록이었다.

우리는 그 페이지를
잠시 들춰본 것뿐이었다.

버스 창에 비친 내 얼굴은
조금 전보다 작아 보였다.

그러나 마음속 공간은
협곡만큼이나 깊고 넓게 열려 있었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나는 오늘보다 더 오래,
더 천천히, 그 바람 속에 서 있으리라.

그날이 오면, 나는 협곡 위를 날 것이다.

날개는 없지만,
이미 마음이 그곳까지 날아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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