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화초를 키우는 할머니

 

살다 보니 알겠더군요.
말이 꼭 있어야 마음이 전해지는 건 아니란 걸요.

수줍은 웃음 하나,
따뜻한 눈빛 하나면 충분할 때가 있어요.

이젠 제 곁엔 조용함만 남았어요.
자식들은 바쁘게 살고,
영감도 먼저 떠났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하루가 그냥 스쳐 가고,
말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이 죽어가던 화초 하나를 주고 갔어요.
“당신 손길이라면 혹시…”

화초는 잎도 없고,
흙도 바싹 말라 있었죠.
꼭 제 모습 같았어요.

그래도 물을 한 모금 줬어요.

며칠 뒤,
가지 끝이 초록빛으로 살아났죠.

노란 꽃 하나가 피어났을 땐
그 꽃이 말하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 나 살아 있어요.”

그날 이후,
베란다에 화분이 늘기 시작했어요.

잎이 뾰족한 아이,
줄기가 춤추는 아이,
꽃을 꼭꼭 숨겼다 피우는 아이들.

그 애들이 절 기다려요.
제 손길을 필요로 하죠.

이젠 아침마다 창을 열어요.
햇살이 들어오고,
화초에게 말을 건네죠.

웃기도 하고,
가끔은 울기도 해요.
다시, 감정이 살아난 거죠.

문득 깨달았어요.
내가 화초를 살린 게 아니라,
화초가 나를 살린 거였구나.

쓸모없는 날은 없었어요.
그저
내 손길을 기다리는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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