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 구석, 오래된 서랍장이 있다.
나무결이 닳고, 손잡이는 헐거워졌지만
아직도 잘 열리고, 잘 닫힌다.
어릴 적 나는 그 서랍을 자주 뒤졌다.
비밀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열릴 때마다 나오는 건 늘 똑같았다.
연필, 오래된 엽서, 누런 손수건.
크게 특별하지 않은 물건들.
그런데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그 안에는 어쩌면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서랍장은 총 네 칸이었다.
나는 줄곧 그렇게 알고 있었다.
첫 칸엔 학창시절 편지와 상장들,
둘째 칸엔 부모님 사진과 오래된 앨범,
셋째 칸엔 이름 없는 열쇠,
넷째 칸엔 어릴 적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그 네 칸이면, 내 과거는 다 들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사 준비를 하던 날이었다.
서랍장 안을 모두 비우고, 집기들을 정리한 뒤
서랍장을 벽에서 살짝 들어 올리는데
바닥 쪽에서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서랍의 무게 중심이 이상하게 쏠리는 것 같아
밑면을 살펴보았더니,
서랍장 아래 나무판이 미세하게 ‘들썩’거렸다.
‘이게 원래 이렇게 움직였었나?’ 싶어
손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려보았다.
그때, 딱 한 군데—
마치 숨겨진 뚜껑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손가락을 넣어 살짝 밀어보니
가볍게 ‘툭’ 하고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얇은 판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다섯 번째 서랍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천천히 그 칸을 열었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먼지 속에서 익숙한 것들이 나타났다.
작고 하얀 털 한 줌.
십여년 전 세상을 떠난 반려묘 ‘몽이’의 털이었다.
그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내 마음이
그곳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다들 울고 있었지만
나는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어떻게 울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털을 한 움큼 모아
서랍 속에 넣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옆엔 찢어진 편지 조각이 있었다.
“엄마, 미안해. 그땐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
사춘기 때, 엄마와 크게 다퉜던 날.
밤새 고민하다가 써봤던 편지였다.
하지만 끝내 건네지 못하고 찢어버렸다.
그 편지가, 이 낯선 서랍 속에서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게 됐다.
이 서랍은
‘물건’을 담는 곳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감정을 보관해 두는 공간이었다.
슬픔, 후회, 미안함, 두려움.
그런 마음들이 먼지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다섯 번째 서랍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기억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숨겨지는 것’이라는 걸.
서랍처럼, 조용히, 묻히듯이.
그 후로 나는 그 서랍을 가끔씩 열어본다.
꼭 어떤 물건을 꺼내려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속에 눌려 있던 나의 감정을
살짝 들여다보는 시간.
그리고 아주 조용히
내가 아직 그때 그 마음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내 자신에게 말해주는 순간이다.
이제 나는 안다.
누구나 마음속에
다섯 번째 서랍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는 걸.
남들이 모르는 칸,
자기만 아는 감정이 고요히 잠든 서랍.
그 서랍을 너무 오래 닫아두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자기 자신을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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