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드라이기 한 대 사이-축축해진 우리 사이에 필요한 것

요즘처럼 햇살 좋은 날엔
빨래도 금방 마른다.
바람에 펄럭이는 수건을 얼굴에 대면
촉감마저 뽀송하다.

그 순간,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랑도 한때는 이랬는데.

처음엔 참 따뜻했다.
서로에게 다가가는 일이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감정이 젖어도
금방 말릴 줄 알았던 우리.

당신이 지치면
내가 등을 토닥였고,
내가 힘들 땐
당신의 침묵이 위로가 됐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서로가 점점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다가가면
당신이 물러섰고,
당신이 말을 걸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우리 사이엔
늘 습기가 맴돌았다.

어느 날,
당신이 머리를 감고
말리지 않은 채 거실에 나왔다.

드라이기를 들었더니
당신은 말했다.
“그냥 자연 바람에 말릴게.”

그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박혔을까.

그날 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을 드라이기를 들고 있었다.

따뜻한 바람은 나왔지만
마음은 차가웠다.
우리 사이도 그랬다.

그때 알았다.
사랑도
그냥 두면 마르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다정했지만
섬세하진 못했고,
사랑했지만
다가가는 법을 잊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조용히 젖어갔고,
결국 흥건해졌다.

지금 나는 혼자지만
드라이기는 여전히 잘 작동한다.

젖은 머리를 말릴 때면
그날의 우리를 떠올린다.

그때 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말려주지 못했을까.

사랑이란
거창한 용기보다
작은 습기를 말려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혹시 지금,
당신 곁에
젖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드라이기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바람으로,
조용히, 가까이.

그 마음이
다시 사랑을
뽀송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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