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다낭에서 마주한 한국의 그림자

 

낯선 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익숙했다.

다낭 공항에 내리는 순간,
나는 오래전 외갓집 마당 끝 논두렁에서 맞았던
그 여름 바람을 떠올렸다.

덥고 습할 거라던 예보와 달리
기온은 30도 남짓. 흐린 하늘 덕에
서울보다 훨씬 부드럽게 느껴졌다.

공기 속에 묘한 따뜻함이 있었다.
여행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가이드는 유쾌했다.
노란 벽이 줄지어 선 호이안 거리,
코코넛 향이 감도는 커피,
강 위를 떠다니는 등불.

말끝마다 웃음이 묻었고,
우리도 그 웃음에 이끌려 걸었다.

그런데, 그가 툭 던진 말 한마디가
내 귀에 걸렸다.

“여기, 예전에 한국군이 있었어요.
전쟁이 있었던 곳이죠.”

농담처럼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 순간,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나는 웃지 못했다.
말의 끝자락에서 묵직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쯤 달리면
하미 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1968년.
그곳에서 135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불타는 집,
숨도 못 쉰 채 쓰러진 아이들.
노인도, 여인도, 예외는 없었다.

지금 그 마을엔
작은 평화비 하나가 서 있다고 한다.

나는 가지 못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가 그런 일을 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어요.”

다낭의 기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퐁니·퐁넛, 빈호아,
익숙지 않은 이름들이 나를 따라왔다.

‘430명’, ‘74명’
차가운 숫자가 아니라,
숨결이 있었던 삶이었다.

밥을 짓고,
아이를 업고,
햇살을 맞았던 사람들.

전쟁은 그 모든 평범함을
가장 먼저 앗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땅에서 슬픔만을 본 건 아니었다.

호이안의 시장 골목은 활기로 가득했고,
아이들은 “삼성! BTS!”를 외치며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바나나를 팔던 아주머니는
덧없이 웃으며 한 송이를 더 얹어주었다.

그 표정은 원망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사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 순간,
1980~90년대 한국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족했지만
희망이 있었던 시절.

묵묵하게 일하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던
우리 부모님의 얼굴.

그 얼굴이,
베트남 사람들 속에도 있었다.

체제는 달라도
사람의 눈빛은 같았다.

요즘 베트남에는
한국 기업이 셀 수 없이 많다.

삼성, LG, 롯데, 현대…
그들의 공장은 도시를 키우고,
젊은이들의 일터가 되고 있다.

가이드는 말했다.
“요즘 베트남 젊은이들은
한국을 하나의 ‘모델’처럼 봐요.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거든요.”

그 말에
기쁘면서도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과거의 상처 위에
새로운 신뢰와 동경이 쌓이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더 조심스러웠다.

역사는 종이 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론 공기 속에 있고,
바람 속에도 있다.

우리는 피해자였고,
또 다른 전장에선 가해자였다.

그 사실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화해가 시작된다.

다낭에서의 마지막 밤.
강변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말없이, 부드럽게.

그 바람엔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실려 있었다.

바람은 국적이 없었다.
다만,
진실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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