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은 언제나 건조했다.
형광등 불빛은 차갑게 내려앉았고, 종이 냄새가 공기 속에 쌓였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고, 의자는 간헐적으로 삐걱거렸다.
선호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
강화도 출신. 대학 합격만으로도 고향에선 자랑이었지만, 첫 직장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서른이 되어 사표를 내고,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지하방의 습기와 곰팡내는 그를 지치게 했다.
그래서 도서관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일정한 온도와 조용한 규칙이 있었다.
그는 거기서 그녀를 보았다.
긴 생머리, 밝은 원피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존재였다.
말은 건네지 못했고, 그저 힐끔거리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책상 위에 캔커피가 놓여 있었다.
차갑게 맺힌 물방울.
누가 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버릴 수 없어 가방 속에 넣었다.
며칠 뒤에도, 또 며칠 뒤에도.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엔 놀람이었고, 곧 호기심이었으며, 이윽고 기다림이 되었다.
책장을 펼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있을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커피는 사라졌다.
그녀의 자리도 텅 비었다.
며칠, 몇 주가 지나도 그대로였다.
그는 공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밤마다 반지하방 천장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탓했다.
“나는 왜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걸까.”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책상 위에 다시 은빛이 있었다.
캔커피, 그리고 얇은 쪽지.
‘1층 커피점에서 만날게요.’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손에 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구석에서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해주였다.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보이지 않던 동안은 아버지 병간호를 하느라 도서관에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선호가 물었다.
“혹시… 그 캔커피가…?”
해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 맞아요. 제가 놓은 거예요.”
선호의 눈이 커졌다.
“왜… 왜 저한테?”
해주는 차분하게 말했다.
“힐끔거리는 눈빛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너무 혼자 같아 보여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주고 싶었어요. 누군가 있다는 걸 알면, 버틸 수 있잖아요.”
그 말은 담담했지만 오래 울렸다.
선호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도서관은 더 이상 싸늘하지 않았다.
점심에는 김밥을 나눠 먹고, 저녁엔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때로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고, 때로는 서로의 노트를 교환해 문제를 풀었다.
해주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종종 했다.
병실 창가로 들어오는 빛을 손등으로 받던 순간, 손바닥으로 허공을 쓸던 모습.
그는 강화도의 겨울 바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래가 피부에 박히던 날, 어머니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려주던 오후.
사소한 이야기가 쌓이며 둘 사이의 리듬이 생겼다.
리듬은 삶을 흘러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시험이 다가오자 말수가 줄었다.
대신 종이와 펜이 대화했다.
시험날 아침, 그는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화이팅.’
글자 두 개에 수백 가지 표정이 달려 있었다.
결과는 잔인했다.
해주는 붙었다.
그는 떨어졌다.
합격과 불합격.
그 간극은 단순한 점수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었다.
해주는 학교에 출근했고, 선호는 다시 도서관에 홀로 앉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책상은 싸늘했다.
그는 점점 해주를 피했다.
밥을 먹자는 말에도 핑계를 댔고, 함께 걷던 길도 외면했다.
자신의 초라함이 그녀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다.
토요일 저녁, 해주는 그를 불러냈다.
한강 바람이 강물 위를 스쳤다.
“왜 멀어져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떨어졌어. 해주는 붙었잖아.”
해주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캔커피를 올려둔 이유, 아직도 몰라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 있다는 걸 알면, 버틸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다리 위 불빛이 강물 위에서 찢어졌다가 다시 포개졌다.
삶도 그렇게 찢어졌다가 언젠가 포개지는 것일까.
겨울, 해주는 강원도의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연락하자.”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거리는 잔인했다.
현실은 두 사람을 점점 멀어지게 했다.
여름 어느 날.
선호는 옆자리에 앉은 낯선 청년을 보았다.
지친 어깨, 무겁게 늘어진 눈꺼풀.
그 모습은 몇 해 전의 자신 같았다.
그는 가방에서 캔커피를 꺼내 조용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청년이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날 밤, 그는 일기에 적었다.
‘사람은 결국 서로의 온도를 나눈다.
작은 마음이 또 다른 하루를 지탱한다.
캔커피처럼.’
가을, 도서관 앞에 해주가 나타났다.
교사의 단정한 차림이었지만, 눈빛은 예전 그대로였다.
둘은 카페에 앉아 각자의 삶을 이야기했다.
해주는 아이들의 장난과 시골 학교의 풍경을 들려주었다.
선호는 여전히 공부 중이라고 했다.
침묵 끝에 해주가 말했다.
“내가 캔커피를 올려두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선호는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페 유리창 너머, 누군가 들고 지나가는 은빛 캔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순간 그는 알았다.
모든 만남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작은 흔적은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는 것을.
해주와 선호의 이야기는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었다.
그저 한 시절을 함께 건너온 두 사람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가, 도서관 책상 위의 캔커피를 발견하겠지.
그 순간, 이야기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아마 그때의 누군가도 모를 것이다.
작은 은빛이 사실은 누군가의 마음이었음을.
그 마음이 한 사람을 버티게 했고, 또 다른 사람에게 이어졌음을.
선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그러나 확실하게 중얼거렸다.
“오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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