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무언가를 마무리짓기에도, 조용히 안기기에도 어울리는 계절.
나는 그 계절의 한복판에서 삼척을 찾았다.
관광 명소나 유명 맛집도 아닌,
그저 바닷가를 따라 걷다가
바람을 피할 겸 들어간 작은 식당이었다.
바깥의 공기는 쌀쌀했고,
내 안의 생각들은 흐트러져 있었다.
“곰치국 드셔보세요. 오늘 물 좋게 들어왔어요.”
주인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나는 메뉴를 고르는 시간을 생략했다.
곰치. 물곰.
어쩌면 처음 듣는 이름도 아니었지만,
먹어본 적은 없는 생선이었다.
괜찮을까?
망설임도 잠깐,
뚝배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그런 생각들을 먼저 삼켜버렸다.
곰치국은 화려하지 않았다.
무와 두부, 파, 마늘이 소박하게 떠 있고,
곰치살은 국물 속에서 흐물흐물하게 퍼져 있었다.
그 모습만 봐선
도무지 맛을 짐작할 수 없었지만,
첫 숟가락을 입에 머금는 순간,
조용한 감탄이 퍼져나왔다.
국물은 맑았지만 깊었고,
곰치살은 부드럽게 흩어지며
내 속을 천천히 적셨다.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어쩐지 익숙했다.
그 맛이
어릴 적 외할머니가 손수 끓여주시던 무국 같기도 했고,
늦은 밤 혼자 마신 인스턴트 라면 같기도 했다.
음식은 맛보다
그 안에 담긴 기억을 데워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곰치국은
그렇게 내 안의 오래된 허기를 어루만졌다.
창밖을 바라보니
가을빛으로 물든 바다 위에
회색 바람이 흩날리고 있었다.
바다는 말이 없었고,
식당 안도 고요했다.
그 적막함 속에서,
나는 곰치국을 먹고 있었다.
얼큰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국물 한 그릇.
그 한 그릇이 이토록 단단한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차가운 바다 바람 속에서 건져 올린 위로와 기억의 음식.
곰치국은 그렇게
내 가을 여행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앉았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많은 국물을 마셨고,
다양한 맛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 가을날,
삼척의 어느 작은 골목에서 먹은 곰치국만큼
조용히 오래 남는 국물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 국물은
나를 말리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람 같았다.
한 숟가락의 따뜻함.
그 어떤 말보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다.
다음번에도 삼척을 간다면,
나는 관광 안내지보다
바람이 부는 골목을 먼저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골목 어귀에서
다시금 곰치국을 만나기를,
조용히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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