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가을 저수지의 파문처럼 – 말 없는 시간 속 이해에 대하여

그날은
이유가 없었다.

겉으론 괜찮은 하루였는데,
속이 조용히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먼지처럼,
한 겹 한 겹 마음에 내려앉는 것들.

나는 차를 몰고
산길로 향했다.
라디오도 끄고, 음악도 없이.
그냥 침묵만을 태운 채,
굽은 길을 돌았다.

정해둔 목적지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저수지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가끔 갔던 곳.
숲에 둘러싸여 세상과 멀어져 있고,
마을과도 등진, 고요한 물가.

그곳에 가고 싶었다.
말을 걸지 않아도
조금은 편안했던 기억.

나는 그곳에서
오래전의 나를 마주했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시간.
말 없는 그의 옆에서
돌멩이를 던지며 놀던 아이.

그와 나는
가까웠던 적도,
멀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관계였다.

그저 조용히 함께 있는 사람.
그게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먼저 떠나셨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오래도록
묵묵히 서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둘만 남았다.

말은 더 적어졌고,
대신 저녁 식사 시간이
조용히 길어졌다.

이따금,
그가 식사 후 혼자 산책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나는 문틈으로 지켜봤다.

지금은
아버지도 떠났다.

그가 없는 이 세상은
왠지 더 조용하게 느껴진다.

말이 없던 사람인데,
그가 사라지자
이 침묵마저
어딘가 허전해졌다.

노랑할미새 한 마리가
수면 가까이 날아들었다.

작은 깃털이 물을 툭 스치자
파문이 천천히 번졌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게 꼭
우리 관계 같았다.

소리 없이 시작돼
조용히 퍼지다가
닿지 못하고 사라지는 울림.

물가에 선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껍질이 갈라진 밑둥,
겹겹이 쌓인 나이테.

시간이 만든 원들.
우리 사이에 말하지 못한 시간들도
그렇게 한 겹씩 남아 있었겠지.

때로는 그런 시간들이
말보다 더 진한 흔적을 남긴다.

나는 조용히
손끝으로 수면을 건드렸다.

새가 만든 물결과
내 손끝의 파문이
잠시 겹쳤다가
서로를 지나쳤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 순간은 분명 있었다.

저수지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 고요함 속에
많은 시간이 잠들어 있다.

아버지의 말없는 오후,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
내가 묻어둔 미처 꺼내지 못한 마음까지.

모두,
이 조용한 물속에 머물러 있다.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물가를 떠나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우리는 끝내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전부 놓친 것도 아니었다.

어떤 마음은
말보다 늦게 도착하고,
그 늦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제
말을 건네는 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려 한다.

그가 남긴 침묵을 등에 지고,
가을 저수지의
그 사라지지 않는 파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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