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문득 코끝이 허전하다.
예전에는 낙엽 타는 냄새가 골목마다 스며들었다.
은근하고 구수한 연기 속에는 유년의 기억이 함께 타올랐고,
그 옆에 서 있노라면 마음까지 데워졌다.
이제는 도시에서 그 냄새를 맡기 어렵다.
낙엽은 봉투에 담겨 사라지고,
골목의 연기와 함께 추억의 길목도 닫혔다.
그 대신, 가을을 알리는 향은 커피에서 온다.
노랗게 물든 가로수 아래,
종이컵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향기.
그것은 더 이상 고향의 연기는 아니지만,
묘하게 그리움의 결을 닮았다.
커피는 가을의 불씨다.
바람에 흩날린 잎새가 발끝을 스칠 때,
잔 속에서 김이 피어오르면
잃어버린 장면들이 되살아난다.
마치 꺼진 자리에서 작은 불꽃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단풍길 벤치에 앉아,
친구와 종이컵을 나눠 든 장면을.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침묵이 더 어울린다.
커피의 쌉싸름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
오래 눌러 두었던 기억이 천천히 깨어난다.
따뜻하든, 쓸쓸하든,
그 기억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다.
연인이어도 좋다.
가족이어도 좋다.
함께라는 사실이 이미 위로가 된다.
나무는 잎을 떨구며 가볍게 서 있고,
바람은 군더더기 없는 소리를 낸다.
그래서인지, 커피 한 모금에도
계절이 전부 스며든 듯하다.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괜찮다.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다.
바람에 부딪히는 낙엽 소리,
잔에 떨어지는 커피의 ‘뚝뚝’ 소리,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풍요롭다.
커피는 말보다 먼저 흐른다.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쓸쓸함도,
부드러운 라테 같은 평화도
잔을 사이에 두고 오간다.
향이 먼저 말을 걸고,
온기가 대답한다.
그 사이에 마음은 천천히 풀려 흐른다.
낙엽 타는 냄새는 이제 기억 속에만 남아 있지만,
커피향은 오늘의 공기 속에서 살아 있다.
사라진 것을 위로하고,
아직 남은 것을 감싸주듯이.
나는 오늘도 커피를 마신다.
한 모금의 따뜻함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발견하고,
아직 남은 것들을 더 깊이 사랑한다.
창밖으로 바람이 분다.
낙엽은 구르고,
커피는 잔 위에서 은은히 피어난다.
그 순간, 나는 문득 묻는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바랄 것이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 한 잔이면
이미 충분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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