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수필

아카시아가 피면 떠오르는 얼굴

 

온 동네에 아카시아 향이 번지기 시작하면
나는 어김없이, 그 애를 떠올린다.

5학년 봄,
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듯한 아이였다.
운동화를 벗으면 양말에 발가락이 비칠 만큼,
매일 뛰어다니며 놀았다.

하굣길은 늘 똑같았지만,
그날그날의 이유는 달랐다.
누군가는 고양이를 따라가고,
나는 꽃길을 따라갔다.

아카시아는 언제나 길가에 피어 있었고
하얗게 핀 꽃잎 아래서는
누구든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꽃을 따먹었고,
지치면 나무 밑에 드러누워
햇살을 똑같이 나눠 가졌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흙바닥에 앉아
아카시아 꽃잎을 손톱으로 반 갈라보고 있었다.

그 애는,
서울에서 전학 온 그 애는
조용히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말도 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잠시 후, 그 애가 말했다.

“이 꽃, 꿀맛 나지 않아? 난 싫던데.”

나는 아무 말 없이
방금 갈라놓은 꽃잎 하나를 들어
그 애 손바닥 위에 살며시 얹었다.

그 애는 나를 빤히 보다가,
작은 한숨을 쉬더니
그 꽃을 책 사이에 끼워 넣고 일어났다.

그게 다였다.

그날 이후로 그 애는
내 옆에 더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나는 꽃잎을 따먹지 않게 되었다.

그 길은 지금 도로가 되었고,
그 나무는 없어진 지 오래지만
매년 5월이 되면
그날의 장면이 필름처럼 되감긴다.

책갈피에 끼워 넣은 한 송이의 꽃처럼,
그 애는 내 기억에 눌린 채로 남아 있다.

나는 지금도 묻는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또 꽃을 받았을까?

이번엔…
그 꽃을 그냥,
받아주었을까?

 

*관련글 보기

bungpoet

Recent Posts

사이버 운세를 읽으며 – 디지털 화면 속에서 길을 찾는 인간의 이야기

디지털 화면 속에서 위로를 찾는 한 청년의 이야기. ‘다시 시도해 주세요’라는 문장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9시간 ago

가을 저수지의 파문처럼 – 말 없는 시간 속 이해에 대하여

단풍든 저수지에서 떠올린 부모님과의 기억. 먼저 떠난 어머니, 말없이 남아있던 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모두 사라진…

1일 ago

장독대 앞 정화수, 어머니의 새벽 기도 — 잊히지 않는 삶의 풍경

새벽마다 장독대 앞 정화수 위에 기도하던 어머니. 그 조용한 떨림이 내 안에서 지금도 살아 숨…

2일 ago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상처받은 날, 나는 다시 태어났다”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가장 깊습니다. 아버지의 무시, 아내의 무관심, 친구의 배신으로 무너졌지만, 그 아픔…

3일 ago

“한 달 시한부, 청년의 미소에 피어난 은행잎 — 삶을 노래한 마지막 가을”

한 달 시한부 선고를 받은 청년이 항암 치료 중 가을의 은행잎을 바라보며 웃는다. 고통 속에서도…

4일 ago

“늙는다는 건 남겨두는 일 – 어머니의 마지막 고무줄”

늙으신 어머니가 바지 고무줄을 묶는 장면에서 시작되는 감성 수필. 늙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와 남겨진 말들을…

5일 ago